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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할수록 더 소비한다, '제본스 역설'

by 비타로그 2025. 9. 27.

19세기 영국, 산업혁명의 심장부에서 한 경제학자가 시대의 상식을 뒤흔드는 관찰을 내놓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 당시 영국 산업의 동력은 석탄이었고,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은 끊임없이 개량되며 석탄 사용의 효율을 극적으로 높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 기술 발전 덕분에 석탄 소비량이 줄어들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요. 하지만 제본스가 발견한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증기기관의 효율이 높아질수록, 영국의 석탄 소비량은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입니다.

 

기술이 발전해서 자원을 더 아껴 쓸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결과적으로는 그 자원을 더 많이 쓰게 되는 이런 기묘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할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입니다.

 

 

더 저렴해진 비용이 불러온 나비효과

제본스의 역설이 발생하는 핵심 원리는 간단합니다. 바로 '비용'의 감소 때문이지요. 특정 자원을 사용하는 기술의 효율이 높아지면, 그 자원을 이용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데 드는 비용이 저렴해집니다. 증기기관의 효율이 높아지자, 석탄 1톤으로 더 많은 동력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비용이 저렴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사람과 산업은 그 자원을 이전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다양한 곳에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석탄의 효율이 높아지자 공장들은 더 많은 기계를 돌렸고, 이전에는 석탄을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산업 분야까지 석탄을 동력원으로 채택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개별 기계의 석탄 소비량은 줄었지만, 사회 전체의 기계 수와 석탄을 사용하는 산업의 범위가 훨씬 더 크게 확장되면서 총소비량은 오히려 늘어나는 결과로 이어진 셈입니다.

 

이처럼 효율성 증가가 본래 의도했던 자원 절약 효과를 상쇄하거나 오히려 소비를 늘리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반동 효과(Rebound Effect)'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반동 효과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삶 곳곳에 숨어있는 반동 효과

반동 효과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직접 반동 효과 (Direct Rebound Effect): 가장 이해하기 쉬운 형태입니다. 연비 좋은 차를 예로 들어볼까요? 자동차 연비가 리터당 10km에서 20km로 두 배 좋아지면, 같은 거리를 가는 데 드는 유류비는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운전 비용이 저렴해지니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자주, 더 멀리 운전하게 될 수 있겠지요. 결국 예상했던 만큼의 연료 절감 효과는 나타나지 않게 됩니다.
  2. 간접 반동 효과 (Indirect Rebound Effect): 효율 개선으로 아낀 돈이 다른 상품이나 서비스 소비로 이어져 발생하는 효과입니다. 예를 들어, 에너지 효율이 높은 냉장고로 바꿔 전기요금을 월 2만 원 절약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많은 사람이 이 돈을 저축하기보다는 다른 곳에 사용합니다. 만약 그 돈으로 주말에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간다면, 냉장고 교체로 절약한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3. 경제 전반의 구조적 효과 (Economy-wide Effect): 효율성 향상이 경제 전체의 구조를 바꾸며 나타나는 거시적인 효과입니다. 특정 기술의 효율 향상은 해당 산업의 생산성을 높여 상품 가격을 낮추고, 이는 새로운 경제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반도체 기술의 발전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가격을 낮추고 성능을 높였지요. 그 결과 이제 우리는 상상도 못 할 만큼 많은 전자기기를 사용하며 살아가고, 이는 전 세계적인 데이터 센터의 에너지 소비 급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처럼 효율성 향상은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경제 규모 자체를 키워 자원 소비를 촉진하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LED 조명부터 인공지능까지

제본스의 역설은 19세기 석탄의 시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에서도 이 역설은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사례 1: 세상을 밝히는 빛, LED의 역설

백열전구에서 LED 조명으로의 전환은 에너지 효율 혁신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LED는 백열전구보다 80% 이상 적은 에너지로 같은 밝기의 빛을 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 조명 분야의 전력 소비량은 크게 줄었을까요? 아쉽게도 현실은 다릅니다. 조명의 비용이 극적으로 저렴해지자, 우리는 이전에는 불을 밝힐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까지 조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대한 빌딩의 외벽을 장식하는 미디어 파사드, 밤새 불을 밝히는 다리와 공원, 집안 곳곳의 간접 조명까지. 빛의 사용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 세계 조명용 전력 소비량은 기대만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사례 2: 똑똑해지는 데이터 센터, 늘어나는 에너지 소비

클라우드 컴퓨팅과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데이터 센터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습니다. 기술자들은 데이터 처리 능력당 전력 소비량을 줄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 데이터 센터의 에너지 효율은 놀라운 속도로 개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본스의 역설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데이터 처리 비용이 저렴해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데이터를 생산하고 저장하며, 더 복잡한 AI 모델을 개발합니다. 유튜브에 고화질 동영상을 올리고, 클라우드에 수많은 사진을 저장하고, 생성형 AI에게 질문을 던지는 모든 행위가 데이터 센터의 부하를 높입니다. 결국 개별 서버의 효율은 높아졌지만, 데이터 센터의 총량과 전체 에너지 소비량은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효율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본스의 역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고도 불편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기술 발전과 효율성 향상만으로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지요. 이 역설은 에너지 효율을 높이려는 노력이 쓸모없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효율성 개선은 분명 필수적이고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제본스의 역설은 효율성 개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효율성을 통해 얻은 이익이 더 큰 소비로 이어지는 고리를 끊어내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원의 가격을 현실화하는 에너지 세금 정책이나, 총량 자체를 규제하는 탄소 배출권 거래제와 같은 정책적 접근이 함께 논의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기술의 발전만큼이나 우리의 소비 습관과 생활 방식을 성찰하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 역시 중요할 것입니다.

 

결국 제본스의 역설은 기술의 한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우리 인간의 행동과 사회 시스템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오래된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율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그 열매를 어떻게 나누고 사용할지에 대한 고민 또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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